"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 개정안은 지방분권을 헌법 제1조 3항에 두고 있다. 헌법 제1조는 한 나라의 주권에 관한 국체(國體)를 담는 조항이다. 지방분권이 단순히 지방자치의 제도화 수준을 높이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 국체를 구성하는 핵심가치이어야 한다는 이 정부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지방분권을 가치로 표현하는 단어가 '로컬리즘'이다. 낡고 작고 지엽적인 비주류 정신에 불과해 보이는 로컬리즘이 왜 갑자기 중요해진 걸까? 지방분권국가는 어떤 나라를 뜻하는가?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으로 대변되는 촛불시민의 역동성은 세월호로 상징되는 특정 사건과 국정농단의 특정 개인의 비리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다. 시민들은 정부와 의회, 기업과 언론에 이르기까지 현 국가 시스템 전반에 불신을 표했다. ‘국가는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보다 근본적인 반성이 요구 되었다.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수준에서 해결될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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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거대한 전쟁을 치르고 달탐사 로켓을 쏘아올리며 혁신을 주도했던 20세기의 국가가 수술대에 오른 건 오일쇼크와 불황에 빠진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비대해진 국가는 작동하지 않는다며 공공의 자산은 팔려 나갔고 익숙했던 서비스도 해체의 길을 겪는다. 그러나, 권력의 칼자루를 쥔 신자유주의로 중앙집권은 더 강화되었다. 국가의 실패를 더 강력한 권력으로 막는건 모순이다. 부조리(不條理)에 따른 사회 갈등만 심화된다. 

영국의 경우, 1997년 노동당 집권은 그래서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앙집권의 폐해를 막기 위한 분권정책(Devolution)이 국정의 기조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의회를 독립시킨 것도 이때, 런던시장을 직선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 지방정부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중앙정부와 자율권 협상에 돌입한 것도 이 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부터 2010년까지 약 10여년 동안 영국 공공부문의 지출은 57%가 증대했고, 그 규모는 GDP의 48%에까지 이르렀다.(HM Government, Open Public Service White Paper 2011) 권력을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2011년, 마침내 로컬리즘법(Localism Act)이 제정되었다. 이법으로 중앙의 경제발전계획은 폐지되었다. 지방정부는 법으로 명시된 금지 사항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General Power of Conpetence). 지방정부 단위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 공동체는 스스로 인근 개발 계획을 작성할 수 있고 지역사회에 필요한 자산 매입의 권한을 갖는다(Neighbourhood Plans, Community Right to Buy).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민 스스로 정부를 대신할 공공서비스 모델을 디자인할 권한도 가진다(Community Right to Challenge). 작은 시작이지만 의미있는 출발이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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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리즘은 권력을 '나누지' 않는다.


2017년, 한 해 신생아 수가 35만명인 나라에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 50만명에 육박했다. 청년 일자리, 저출산에 국가 재정을 수십조를 뿌려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돈을 제 것인 양 뿌릴 수 있는 '자리'만 더 크게 보일 뿐이다. 중앙집권의 방식은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시스템이 지역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상상의 중앙을 위계로 한 줄 세우기를 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이 근거하는 지역이 청년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일자리 정책은 모두 실패한다. 승자의 사다리 걷어차기, 지대추구가 갑질문화, 격차사회로 확대한다. 

그래서 로컬리즘이고 지방분권국가다. 로컬리즘은 그러나 권력을 '나누지' 않는다. 지방이라는 이유로 소외되어 있던 권력의 주체들에 제 위상을 찾아주고 문제 해결의 당사자로 호명하는 과정이 로컬리즘일 뿐이다. 지방분권은 작은 권한, 봉토(封土)를 나누어 갖고 저마다의 성을 쌓는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다. 지역 패권에 기대는 지역주의 정당에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도, 중앙이 시혜적으로 나누어 주는 작은 권한을 두고 갈등과 경쟁을 지속해 온 소지역주의도 아니다. 이들은 규모만 다를 뿐 또다른 중앙집권주의이다. 영국의 경험에서 보듯, 핵심은 ‘권한’을 나누는 데 있지 않고 ‘권력의 패권적 성격’을 바꾸고 새롭게 디자인 하는 데 있다. 

 

 F.N. Souza (1990) Last supper, 121x183 oil on canvas, https://www.glenbarra.com/display/fn/10.html

F.N. Souza (1990) Last supper, 121x183 oil on canvas, https://www.glenbarra.com/display/fn/10.html


 
Renaissance painters painted men and women making them look like angels. I paint for angels, to show them
what men and women really look like.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인간의 모습을 천사로 묘사했다면,
나는 진짜 인간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천사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다.
-- F.N. Souza, 1962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을 기계적이고 수동적 존재로 전제하는 이상, 초복잡사회로 진화한 인간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낼 국가의 역량은 줄어든다. 서로 다른 생김, 제각각의 욕망이 존중받지 못하는 공장식 사회는 결국 질식한다. 작동성(workability)의 관점에서 보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 만큼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체제는 없다. 장소(place)에 기반해 사는 인간의 삶과 그 현장에 천착하지 않으면 21세기 우리가 맞닥뜨린 여러 사회 문제들, 민주주의의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로컬리즘 구현에 실패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조용히, 그리고 부유하게 잘 사는 나라는 모두 확고한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들이다. 예외가 없다. 그리고 그들 민주주의는 더 깊이 지역의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집권의 효율성과 분권의 민주성은 충돌하지 않는다. 

 


 

지방분권은 국가혁신의 방법이다.


지역은 인간 군상들이 기대어 사는 삶의 공간이다.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200년, 지역이 본래의 질감을 잃게 된 것은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성장 때문이다. '짐이 곧 국가'였던 시대를 지나 근대 국가는 그 봉사의 대상을 국민 일반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는 '거느리고 다스리는' 왕정 시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공무원, 정치인은 '관료-벼슬'이고 시민은 아직 '백성-수혜자'이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백성을 위해 국가는, 그 옛날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은혜를 배푸는 존재다. 개념적으로 보면, 개인의 생활세계까지 세밀하게 간섭하는 복지국가가 그 절정이었는지 모른다. 정책생산의 지혜와 주도권은 오직 합리와 객관으로 포장된 국가, 관료에게만 주어진다. 근대국가가 봉사의 대상으로 삼은 권력자, 국민은 그렇게 지워졌다. 

어쩌면 아주 갑작스럽게, 21세기에 들어선 국가는 멀쩡하고 크게만 보일 뿐, 무능하기 짝이 없다. 세월호의 경우 처럼, 작은 일의 실패를 더 큰 일로 덮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와 성격의 사고만 연발한다. 다 끝난 줄 알았던 냉전이 다시 시작되고 전쟁과 테러는 끊이지 않는다. 기후환경 변화와 관련한 조그만 합의 하나 지켜내기 힘들다. 초국가적 경제가 시작된 것이 언제인데 보호무역과 무역전쟁이 재발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수천만명의 정보가 유출되어 선거판에 이용되고 숫자로 포장된 시민의 뜻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국가경제가 다르고 시장경제, 가족경제가 다른데 서로 다른 작동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 보수주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단순 무식, 과격해졌다. 공통의 비전 아래 합리적인 목표를 추구했던 근대국가의 효율성은 기대하기 힘들다. 디스토피아인가? 지방분권국가의 비전, 로컬리즘이 하나의 치유가 되길 바란다.

 

 Image from The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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