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감독,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배경은 영국 뉴카슬(Newcastle)이다. 심장 이상으로 목수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질병급여 신청은 반려된다. 복지국가는 의학적 소견도 아닌 까다로운 급여 신청서류와 점수로 다니엘을 평가한다. 실업급여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편리한’ 인터넷으로 서류를 제출하라지만 그는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른다. 사회계약은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돕는 이는 쓰레기도 버릴 줄 모르는 밀수꾼 옆집 청년이었다. 전열비가 밀려 가구까지 다 처분해야 했던 다니엘 역시 주거비 비싼 런던에서 잉글랜드 북쪽 끄트머리 뉴카슬까지 밀려난 케이티와 그 아이들을 돕는다.

영화는 제도와 규정으로 틀어막힌 행정과 이웃과 시민의 상식적 연대를 대조(對照)한다. 유불리의 계산없이 인간 존엄과 생명을 지켜주려 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이웃이었다. 수십년 세금을 바친 복지국가가 외면할 때 이들 평범한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과연 그것은 '예외적'인 선행일 뿐일까? 마지막 장면, 다니엘이 남긴 선언에 ‘함께’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 상식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적 경제인' 이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는 경제를 애써 외면해 왔던 건 아닐까?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이윤 동기가 지배하는 경제 매커니즘이 장악한 19세기 이후 서구문명을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를 문명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시대라 말한다. 이전엔 달랐다는 것이다. 지난 200년 이전 시대 수십만년 동안 인류는 나름대로 호혜적인 질서를 발전시켜왔다.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생산과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자원의 재분배도 윤리적으로 구축되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본주의 이전 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내부에도 그만한 균열은 늘 존재했다. 협동조합이 그러하듯, 자본주의가 한창일 때도 자본주의 아닌 시스템은 곳곳에서 실험되고 실제 효과적으로 작동한 예는 많다. 심지어 금융도 예외가 아니다. 


Pat Conaty : Back To The Future 백 투 더 퓨쳐? 


 

Ashley Vale Self Builders 애슐리베일의 경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디어에는 그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다. 자본주의는 '투자'라는 '꿈'의 기술로 선전되었다. '메리 포핀스(Mary Poppins)'라는 영국 동화(디즈니의 뮤지컬로도 각색되었다)에도 나오듯, 아프리카의 철도, 나일강의 댐, 대양의 선박과 운하의 건설이 자본주의의 작동으로 가능했다. 은행과 보험의 거리, 런던은 그렇게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 자본의 기술을 '모두'의 꿈으로 바꾸면 어떠한가? 

애슐리 베일(Ashley Vale) 사례가 시사점을 주는 것은 이 지점이다. 공동체의 힘으로 난개발을 막고, 자금과 아이디어를 모아 그들만의 새로운 마을을 건설한다. 협동조합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았다. 개인은 개성을 지키되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모험에 용기를 주고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비지니스를 창안하며, 미래를 보고 이웃 공동체를 지원한다. 브리스톨 공동체 토지신탁(BCLT)의 셀프피니시 매니저로 등장했던 잭슨 몰딩의 마을, 애슐리 베일 이야기다.

 

FILM : Ashley Vale Self-Build Co-operative



The Mutual Future, 호혜의 미래

영국의 사회혁신은 저항의 운동이라기보다 기업가 정신에 충만한 '사회사업'으로 보인다. 이들은 밖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정치에 전부를 걸고 전복을 기다리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천에서 새로운 방법,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을 찾는다. 작은 아이디어라도 미래사회 전체를 걸고 투자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인다. 

그동안 자본주의의 문제는, 사유 재산에 기초한 경제, 사회 운영 시스템의 문제다. 가진자 만이 그 가진 것(資)을 근거(本)로 자원을 독점하는 구조다. 빈익빈부익부는 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돈을 부정하는 것으로 돈이 성취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수는 없다. 자본(資本)을 ‘돈의 문제’ 로만 해석한다면 부족한 면이 있다. 금융은 문명의 기술이다. 19세기의 철도, 항만, 운하 뿐아니라 오랜 시간의 과학적 분석이 필요한 의료장비, 다수의 협력이 필요한 첨단 소프트웨어는 수단으로서 화폐의 기능, 장기 투자와 회계시스템 없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

물론, 국가가 그런 투자를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부를 재분배하거나 재정을 통해 주택을 공급하는 경우에도 사적소유, 이윤동기의 원리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한 한계는 분명하다. 국가 자체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국가에서의 지위를 또다른 자본으로 활용하는 관료주의, 지대추구(rent-seeking)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복지국가가 작동을 멈추는 지점이다. 기를 쓰고 공무원이되고자 하는 청년들의 몸부림은 지위가 자본이 된 시대의 불온한 자화상이다. 

상호부조, 호혜적 미래는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 가치를 나누는 공동체가 자본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신용은 사적 자산에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 필요, 신념과 의지에도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본을 호혜적인 방식과 목표에 쓰도록 국가가 보장하고 지원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보증인이며, 자산화와 공동번영을 촉진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기적 개인을 다수결로 '지배'하는 제도가 아니라 잠재된 호혜성을 발현시키는 긍정의 에너지로 작동한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토크빌(Alexis Tocqueville)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대중의 지배 이상의 것이 되려면 민주적 상호부조의 정신(Democratic Mutual Aid Spirit)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자유시장경제는 과도한 개인주의에 경도되고 국가에 대한 수동적 자세, 정치적 무관심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협동할 줄 아는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토크빌이 간파한 민주주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변화가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영국의 로컬리즘법, 스코틀랜드 토지개혁의 취지가 공동체 자산화에 있고, 웨일즈 정부, 로치데일 구청이 때론 수십조에 달하는 주택소유권을 넘기는 것도 공동체의 역량을 믿고 스스로 번영을 모색할 기회를 터주는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BCLT의 주민과 협동조합학교의 학생, 학부모 그리고 RBH 조합원과 에슐리베일의 셀프빌더까지 이들은, 협동의 모델로 지역과 사회, 나아가 국가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