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회의사당, Westminster Palace

 

유수의 사회개혁가들의 후원으로 시작된 보통교육 정책, 공교육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반복되는 도시와 주거 문제를 왜 여태 효과적으로 해소해내지 못하는가? 왜 공공서비스의 비용은 늘어나고 품질은 저하하는가? 정권의 교체가 일정한 압력이 되고 정부의 자정 역량을 높일 수는 있다. 하지만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구조와 운영시스템은 조직 안정화의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그 역(逆)은 없다. 정책 우선순위에 따라 부서가 통폐합 또는 독립되고 이름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 시스템은 선거와 관계없이 견고해지고 보수화 된다. 이제 혁신은 그 안정 지속 상태(state)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즉 국가(State)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청하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지금이 그런 혁신이 요청되는 시기다. 에드 마요(Ed Mayo) 영국협동조합연합회 대표의 주장처럼 오늘날 국가는 새로운 정통성을 요청받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d Mayo : Public Service Innovation 공공서비스 혁신?


 

The Mutual State, 호혜적 국가

제도와 절차의 민주주의가 성숙되면 계약으로서의 국가라는 관념이 확대된다. 유럽의 복지국가는 국가와 시민이 맺은 복지, 공공서비스라는 사회계약이었다. 사회 안전과 공공의 복리를 지키는 국가의 역할을 부여하고, 4-5년에 한 번, 주권자로서 이를 대행할 일군의 정치세력을 대리자로 임명한다. 에드 마요가 말하는 대표성(constituency)의 위기란 그러한 국가-서비스제공자, 시민-사용자의 이분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민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국가의 위상을 인정하는 순간, 정교해지는 관료사회로부터 주권자의 소외는 불가피해진다. 열정(morale)은 식고, 약속은 법률과 예산에 묻혀 잊혀진다.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시민 입장에선 계약의 효용을 근본적으로 따져 묻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호혜적 국가'(Mutual State) 개념은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나온 새로운 사회계약의 아이디어다.

 
 

"There is, however, a new vision for government, based not on serving citizens but on co-operating with them. The idea is simple. Citizens, on their own or coming together at a neighbourhood or some other level, play a key role in the design and delivery of public services." - Ed Mayo

새로운 정부의 비전은 시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하는 협력에 기반하고 있다. 간단히, 시민 스스로 또는 이웃과 다른 공동체가 직접 공공서비스를 디자인하고 집행하는 핵심 역할을 맡는 것이다. - 에드 마요, "The Mutual State ; How local communities can run public services", by Ed Mayo and Henrietta Moore

 
 

문제는 이때 '파트너'로서 ‘시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가 또는 그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해선 자원이 필요하고 그 자원을 재배치할 때 어떤 주체에게 무슨 근거로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 그것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와 무엇이 다르고 그 건강성은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들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뮤추얼 국가의 개념은 공염불에 불과해 진다. 우리가 로치데일 상호주택조합(Rochdale Boroughwide Housing, RBH) 사례에 주목한 것은 그 때문이다. 

 
 

RBH, Rochdale Boroughwide Housing 로치데일 상호주택조합

RBH는 원래 구청이 소유한 임대주택의 위탁관리를 위해 2002년에 만들어졌다. 구청이 소유한 공기업이라는 점에서 구청이 직접 관리했던 이전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2009년부터 진행된 거버넌스 개편 논의의 핵심은 주민 참여 제고 방안이었다. 마침내 2012년, 수년간 지속된 회의의 결과 로치데일 구청은 구청이 가진 모든 임대주택의 소유권을 아예 이 위탁관리 회사 RBH로 넘긴다. RBH는 주민과 종업원 그리고 구청이 함께 이사회를 구성하는 상호조합이 되었다.

여기서 마법이 작동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같은 일개 위탁관리회사에 불과했던 회사는 자산가치 수십조에 달하는 13,400개의 집을 소유하고 600명의 상근 직원을 거느리며 무려 천억원에 이르는 한 해 매출을 기록하는 초대형 기업이 된다. 기존 주택의 관리를 넘어서 지역을 위한 투자 기회를 발굴하고, 그에 따라 자산을 개발하고 재배치하는 권한까지 갖게 된 것이다. 지역의 이해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번영을 도모하고, 그 이익은 다시 공동체로 귀속되는 선순환 구조가 갖춰졌다.

민주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조직운영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꿈같은 일이고 어쩌면 끊임없는 반성의 프로세스 그 자체 일 수도 있다. 2012년 소유권 이전 이후 거버넌스 구조는 지속적인 실험과 리뷰를 반복하고 있다. 특정 부문, 특정 소수의 전횡은 없을까? 주민, 종업원, 구청처럼 이해관계가 부딛히는 조직의 지속가능성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민주주의와 협동의 열정은 유지할 수 있을까? RBH의 이사, 대표자 연석회의를 들여다 보자.

이 회의엔 구청CEO가 직접 참석해 구청의 재정상황, RBH와 구청의 관계를 설명하고 약 2시간에 걸쳐 주민대표, 종업원 대표들과 질의 응답이 진행되었다. 영국에서 구청의 CEO는 선출직 공무원이 아니라 한국의 큰 지자체의 행정부시장과 같은 최고위급 공무원이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에서 지자체 행정조직의 CEO는 선출직 의원들의 대표(한국의 경우 구청장 또는 의회의장)보다 더 강력한 집행 권한, 조직 장악력을 갖는 경우가 많다.

 

FILM : RBH, Rochdale Boroughwide Housing



 

로치데일은 세계 최초로 협동조합의 아이디어가 성공한 도시다. 협동조합의 이름부터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조합 이었다. 그 역사성을 이은 RBH가 선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뮤추얼(mutual, 상호 또는 호혜로 번역한다)' 협동이다. 과거의 협동조합이 '소비자' 협동조합과 같이 이해를 같이하는 일부문의 조직에서 출발했다면 뮤추얼, 상호조합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조합원을 포괄하는 협동조합이다. 다름 속에 공통의 가치와 이해를 발견하는 차원 높은 '사회적 경제' 또는 호혜적 경제다. 

거버넌스, 협치(協治)가 운위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협치는 단순히 권한을 나누어 주는 시혜적인 것이 아니다. 구청의 자산 이양(transfer)은 소유권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의 성격, 작동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협치는 너-나-우리 모두가 바뀌어야 하고 일의 가치, 목표, 프로세스 등 시스템 전체를 새롭게 설계하는 일이다. 입주민(사용자), 종업원(서비스제공자), 카운슬(국가)이 함께하는 RBH의 실험이 진정한 사회혁신, 사회적경제의 가능성으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의 묘소